오익스

송로건 데일리 블로그

헤르만 브로흐, 밀란 쿤데라가 바라본

Written by

제목: 헤르만 브로흐의 삶과 문학, 그리고 밀란 쿤데라의 조명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 헤르만 브로흐(Hermann Broch, 1886-1951)는 20세기 유럽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본래 섬유공학도였던 그는 4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짧은 창작 기간에도 불구하고 『무죄한 자들』, 『베르길의 죽음』 등 방대하고 심오한 작품들을 탄생시켰죠.

브로흐 문학의 핵심은 ‘인식의 위기’에 대한 천착입니다. 그는 전체주의와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현실 속에서 인간 존재와 인식의 근원을 탐구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분열되고 파편화된 세계를 ‘총체성’으로 껴안으려 한 작가적 고투로 이어집니다. 가치 체계의 붕괴 속에서도 예술을 통해 인류애와 총체성을 지향한 브로흐. 체코 출신 작가 밀란 쿤데라는 그의 이러한 면모에 주목했습니다.

쿤데라는 에세이 『배반당한 유언들』에서 브로흐를 집중적으로 조명했는데요. 쿤데라가 브로흐에게서 발견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소설적 사유’입니다. 논증과 서사가 녹아든 브로흐 소설의 복합성은 쿤데라가 이상으로 삼았던 바였죠. 둘째, ‘밀도’ 있는 서술입니다. 인물의 내면 의식을 시적이고 함축적인 문장으로 응축해내는 브로흐의 필력을 쿤데라는 높이 평가합니다. 셋째, 예술가로서의 사명의식입니다. 브로흐에게 예술이란 궁극적으로는 인류 구원을 위한 것이어야 했으며, 쿤데라 역시 그 지점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한편 쿤데라는 브로흐의 한계 또한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비판이 아닌, 브로흐가 열어젖힌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에 대한 열렬한 탐구였습니다. 쿤데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브로흐가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이유는 그가 성취한 업적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하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한 것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이 불완전하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예술형식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거든요.”

쿤데라가 주목한 브로흐 문학의 또 다른 실험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현대사회의 복잡성을 잡아내면서도 구조적 명증성을 잃지 않기 위해 비본질적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려 한 점, 철학과 서사와 꿈을 하나의 음악으로 엮어내는 ‘소설적 대위법’을 시도한 점, 당연한 메시지 전달보다는 가설과 유희, 아이러니를 즐기는 독특한 ‘소설적 에세이’를 지향한 점 등입니다. 비록 그 시도들이 완성에 이르지는 못했어도, 브로흐의 개척정신은 쿤데라를 비롯한 후대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감을 주었습니다.

나치 치하의 망명 생활, 미완의 장편 속 절절한 사색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며 ‘앎의 기쁨’을 좇았던 브로흐. 쿤데라는 헤르만 브로흐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문학적 이상을 투영하고 재확인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록 그 험난한 모색의 여정이 완벽한 결실을 보지는 못했지만, 20세기의 암흑을 뚫고 인류애의 지평을 열고자 했던 브로흐의 치열한 삶과 문학은 여전히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전하고 있습니다.


댓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